시바 료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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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郎)는 일본의 소설가로, 사마천의 이름을 따 필명을 사용했다. 1923년 오사카에서 태어나 오사카외국어학교 몽골어과를 졸업하고, 만주와 일본 본토에서 군 복무를 했다. 신세계신문, 신일본신문, 산케이신문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단편소설로 문단에 데뷔했다. 1960년 소설 《올빼미의 성》으로 나오키상을 수상했고, 이듬해 퇴사 후 본격적인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역사 소설 《료마가 간다》, 《타올라라 검》 등으로 유명해졌으며, 기행 수필 《가도를 가다》를 통해 일본 문화를 탐구했다. 1981년 일본예술원 회원, 1991년 문화공로자, 1993년 문화훈장을 수훈했다. 1996년 사망했으며, 그의 작품은 다양한 형태로 제작되어 많은 사랑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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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바 료타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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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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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후쿠다 데이이치 |
출생일 | 1923년 8월 7일 |
출생지 | 오사카부 오사카시 미나미구 난바 서신덴초 (현재의 나니와구 시오쿠사) |
사망일 | 1996년 2월 12일 |
사망지 | 오사카부 오사카시 주오구 호엔자카 (국립 오사카 병원) |
안장 장소 | 니시혼간지 오타니혼뵤 |
직업 | 소설가, 논픽션 작가, 평론가 |
언어 | 일본어 |
활동 기간 | 1955년 - 1996년 |
장르 | 역사 소설, 추리 소설, 희곡, 수필, 기행 |
주제 | 일본의 역사와 풍토 |
주요 작품 | '올빼미의 성' (1959년) '료마가 간다' (1962년 - 1966년) '타올라라 검' (1964년) '나라 훔친 이야기' (1965년) '언덕 위의 구름' (1968년) '길을 가다' (1971년 - 1996년, 기행문) '나는 듯이' (1976년) '항우와 유방' (1980년) |
수상 | 나오키 산주고상 (1960년) 기쿠치 간상 (1966년) 마이니치 예술상 (1968년)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상 (1972년) 일본 예술원상 · 온시상 (1976년) 요미우리 문학상 (1982년·1987년) 아사히상 (1983년) 일본 문학 대상 (1984년) 오후라 지로상 (1988년) 문화훈장 (1993년) 증 종3위 · 하사 은배 한 쌍 (1996년, 몰시 서위 하사) |
데뷔 작품 | 후쿠다 데이이치 명의 '명언 수필·샐러리맨' (1955년) 시바 료타로 명의 '페르시아의 환술사' (1956년) |
영향 | 하기와라 엔주 사카구치 안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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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 시바 료타로 기념관 |
2. 삶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郎|시바 료타로일본어)라는 필명은 한(漢) 시대 역사가 사마천(司馬遷)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시바는 사마의 일본식 표기이다).[1] 그는 오사카 외국어학교(현 오사카 대학 외국어학부[2])에서 몽골어를 전공했으며, 산케이 신문에서 기자로 경력을 시작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역사 소설을 쓰기 시작했으며, 특히 에도 시대 말기와 메이지 시대 초기에 일본이 겪은 극적인 변화를 주제로 다루었다.
1959년 소설 《부엉이 성》(梟の城|후쿠로노 시로일본어)으로 나오키상을 수상하며 작가로서 이름을 알렸다. 그의 주요 작품으로는 《군토리 이야기》(國盜物語|구니토리 모노가타리일본어), 《료마가 간다》(竜馬がゆく|료마가 유쿠일본어), 《모에요 켄》(燃えよ剣|모에요 켄일본어), 《산 위의 구름》(坂の上の雲|사카노우에노쿠모일본어) 등이 있으며, 이들 작품 대부분은 드라마화되었고, 특히 NHK 대하드라마로 제작되어 큰 인기를 얻었다. 또한, 일본과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쓴 기행 수필 시리즈 《가이도오 유쿠》(街道を行く|가이도오 유쿠일본어)를 잡지 주간 아사히에 1,146회에 걸쳐 연재하기도 했다. 시바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독창적인 분석으로 널리 인정받았다. 1993년에는 문화훈장을 받았다.[3]
그의 여러 작품이 영어로 번역되었는데, 대표적으로 《만취한 영주: 사무라이 이야기》(Drunk as a Lord: Samurai Stories영어)(2001), 구카이(空海)의 삶을 다룬 《우주적인 구카이: 그의 삶의 장면들》(Kukai the Universal: Scenes from His Life영어)(2003),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의 전기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삶》(The Last Shogun: The Life of Tokugawa Yoshinobu영어)(2004), 17세기 동아시아를 배경으로 한 《타타르의 회오리: 17세기 동아시아 소설》(The Tatar Whirlwind: A Novel of Seventeenth-Century East Asia영어)(2007), 《산 위의 구름》(Clouds Above the Hill영어)(2012-2014) 등이 있다.
시바는 1996년 2월 10일 내부 출혈로 혼수상태에 빠졌고, 이틀 후인 2월 12일 사망했다.[3]
2. 1. 어린 시절
시바 료타로의 본명은 후쿠다 데이이치(福田 定一)이다.[1] 1923년 8월 7일, 오사카부 오사카시 미나미구(南区) 난바니시간다 정(難波西神田町, 현 나니와구 시오쿠사(塩草))에서 약국을 운영하던 약제사 아버지 후쿠다 고레사다(福田是定)와 어머니 나오지(直枝)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2] 형은 두 살 때 일찍 세상을 떠났고, 누나와 여동생이 한 명씩 있었다. 어릴 때 각기병을 앓아 세 살까지 나라현 기타카쓰라기군(北葛城郡) 다이마정(當麻町, 현 가쓰라기시)의 외가에서 자랐다. 외가 주변에는 고분이 많아 토기 조각이나 돌화살촉 등을 주워 모으기도 했으며, 당시 소년들처럼 대륙의 마적(馬賊)을 동경하기도 했다.1930년 오사카시 난바시오쿠사 심상소학교(難波塩草尋常小学校, 현 오사카 시립 시오쿠사 다테바 소학교)에 입학했다. 성격은 밝았으나 학교 생활을 싫어하는 개구쟁이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1936년 사립 조궁중학교(上宮中学校, 현 조궁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입학 초기 성적은 300명 중 거의 꼴찌였으나, 이에 놀라 공부에 매진하여 2학기에는 상위 20위 안에 들었다. 이 무렵 이부세 마스지의 『이와타 군의 크로』(岩田君のクロ)를 읽고 감명을 받았다. 3학년 때부터 도서관에 다니기 시작하여 구제 오사카 외국어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다양한 분야의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한국의 《월간중앙》 보도에 따르면, 중학교 1학년 영어 시간에 '뉴욕'이라는 지명이 나오자 교사에게 그 의미를 물었으나 시큰둥한 반응을 얻자 직접 도서관에서 유래(영국 요크 공의 이름에서 따옴)를 찾아냈고, 이를 계기로 도서관을 더욱 자주 드나들게 되었다고 한다.[84] 근처 백화점 서점에서 요시카와 에이지의 《미야모토 무사시》 전집을 서서 모두 읽었다는 일화도 있으며, 심지어 낚시나 장기 관련 책까지 섭렵했다고 한다. 취미로 등산을 즐겨 오사카 주변의 명산을 자주 찾았다.
중학교 시절, 중일전쟁과 제2차 세계 대전의 영향으로 학교 교련을 받았다. 당시 배속 장교가 일본군의 주력 소총인 38식 보병총에 대해 설명하며, 한 발씩 쏘는 볼트액션 방식이 연발식 소총보다 "마음을 담아 명중시킬 수 있어 좋다"고 설명했다고 시바는 기록했다. (그러나 당시 주요 열강의 주력 소총 대부분이 볼트액션 방식이었으므로, 일본군 소총만 특별히 뒤떨어진 것은 아니었다.[12][13][14][15][16]) 시바는 학교를 싫어했지만, 학교 생활을 통해 만난 중국인과 조선인들에게 "매우 인간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이유로 호감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자신의 조국인 일본이 중국과 전쟁을 벌이는 것에 대해 복잡한 감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시바의 부인 후쿠다 미도리는 남편이 나이가 들어도 호기심을 잃지 않고 오히려 혼이 젊어지는 듯했다고 회고했다.[84]
1940년 구제 오사카 고등학교, 1941년 구제 히로사키 고등학교에 지원했으나 모두 불합격했다. 집안 사정상 사립학교 진학이 어려워 국공립 학교만 지원해야 했다.
1942년 4월, 구제 오사카 외국어학교(大阪外国語学校, 현 오사카 대학 외국어학부) 몽골어학과에 입학했다.[17] 당시 많은 학생들처럼 어학 공부는 싫어했고 와세다 대학 중국문학과로 편입할까 고민하기도 했지만, 독서는 여전히 좋아하여 러시아 문학과 사마천의 《사기》를 애독했다. 그의 필명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郎)는 훗날 사마천(司馬遷)에 버금가는 작가가 되겠다는 의미에서 따온 것이다.[1] 학교에서는 밝은 성격으로 인기가 많았고, 입학 환영회에서 분위기를 띄우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구제 고등학교를 동경하여 게다를 신고 등교했으며, 식성도 좋아 아침밥을 다섯 그릇씩 먹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 좌우명은 '중용(中庸)의 덕(德)'이었다. 학교에는 2년 후배인 쇼노 준조(庄野潤三)(영어학과), 1년 선배인 진순신(인도어학과), 동기인 아카오 도시(赤尾兜子)(중국어학과) 등이 속한 '창작 클럽'이 있었으나 가입하지는 않았다.
2. 2. 군 복무
1943년 11월,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오사카 외국어학부를 임시 졸업하고(이듬해 9월 정식 졸업) 효고현 가토군(지금의 오노시)에 있는 전차 제19연대에 입대했다. 1944년 4월에는 만주 쓰핑의 쓰핑 육군전차학교에 입교하여 같은 해 12월에 졸업했다. 이후 만주 무단장에 주둔하던 구루메 전차 제1연대 제3중대 제5소대의 소대장으로 배속되었다.1945년, 본토 결전을 위해 니가타현을 거쳐 도치기현 사노시로 이동했고, 이곳에서 일본 육군 소위로 복무 중 제2차 세계 대전 패전을 맞았다. 패전 후 시바 료타로는 "옛날 일본인은 좀 더 성실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22살의 자신에게 편지를 쓰는 기분으로 소설을 썼다"고 술회했다.
2. 3. 기자 시절
오사카 외국어학교(현재 오사카대학 외국어학부[2])에서 몽골어를 전공했으며, 일본의 주요 신문 중 하나인 산케이 신문(産經新聞)에서 기자로 경력을 시작했다.2. 4. 결혼
1950년 오사카 대학 의국(医局)의 약제사와 만나 첫 결혼을 했고, 1952년 장남이 태어났다. 그러나 1954년에 이혼했으며, 장남은 시바 료타로의 본가인 후쿠다가(福田家)에 맡겨져 조부모 슬하에서 자랐다. 당시 그의 결혼 사실이나 아들의 존재는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1959년 1월에는 같은 산케이 신문 기자였던 마쓰미 미도리(松見みどり)와 재혼하였다.
2. 5. 소설가 시절
1959년 소설 《부엉이 성》 梟の城|후쿠로노 시로일본어으로 나오키상을 수상했고, 이듬해(1960년) 산케이 신문 기자직을 그만두고 작가 활동에 전념하기 시작했다.[1]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역사 소설을 쓰기 시작했으며, 특히 에도 시대 말기부터 메이지 시대 초기에 걸쳐 일본이 겪은 격동기를 주로 다루었다.본격적인 역사소설가로서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린 작품으로는 《료마가 간다》 竜馬がゆく|료마가 유쿠일본어(1963년~1966년), 《모에요 켄》 燃えよ剣|모에요 켄일본어(1964년), 《나라 훔친 이야기》 国盗り物語|구니토리 모노가타리일본어(1965년) 등이 있다. 이 작품들은 대부분 드라마, 특히 NHK 대하드라마로 제작되어 큰 인기를 끌었다.
그의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인 《료마가 간다》(竜馬がゆく|료마가 유쿠일본어)는 메이지 유신의 주요 인물인 사카모토 료마의 삶을 그린 소설이다. 이 소설이 발표되기 전까지 사카모토 료마는 일본 역사에서 비교적 덜 알려진 인물이었으나,[4] 소설의 폭발적인 인기로 일본 국민 영웅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이 작품은 일본 내에서 2,125만 부 이상 판매되어 시바 료타로의 최고 베스트셀러로 기록되었다.
또 다른 대표작 《산 위의 구름》 坂の上の雲|사카노우에노쿠모일본어(1969년)은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 국가로 나아가는 일본을 배경으로, 아키야마 형제의 삶과 러일 전쟁을 중심으로 한 역사 서사시이다. 이 작품 역시 1,475만 부가 판매되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71년부터는 잡지 주간 아사히에 기행 수필 시리즈 《가도를 가다》 街道をゆく|가이도오 유쿠일본어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이 시리즈는 1996년까지 총 1,146회에 걸쳐 연재되었으며,[3] 일본 국내는 물론 중국, 한국, 유럽 (스페인, 포르투갈, 아일랜드, 네덜란드), 몽골, 대만, 미국(뉴욕) 등 세계 여러 지역을 답사하며 역사, 지리, 인물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과 독특한 시각을 담아냈다.[5] 이 시리즈는 NHK에서 다큐멘터리로도 제작 방영되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에 걸쳐 《나는 듯이》 翔ぶが如く|도부 가 고토쿠일본어(1975년~1976년), 《나비의 꿈》 胡蝶の夢|고초노 유메일본어(1979년), 《유채꽃의 바다》 菜の花の沖|나노하나노 오키일본어(1982년), 《하코네 고개》 箱根の坂|하코네노 사카일본어(1984년) 등 왕성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1987년 《타타르 질풍록》 韃靼疾風録|닷탄싯푸로쿠일본어을 발표한 이후로는 소설 집필을 점차 줄이고, 《가도를 가다》를 비롯한 수필과 문명 비평 작업에 집중하며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역사적, 문화적 질문을 던지는 데 몰두했다.
소설가로서 활동하는 동안 나오키상(1960년), 기쿠치 간 상(1966년), 요미우리 문학상(1981년)[10], 아사히상(1982년) 등을 수상했으며, 1991년에는 문화공로자로 선정되었고, 1993년에는 문화훈장을 수훈했다.[3]
2. 6. 만년과 죽음
1990년대 초부터 허리 통증을 앓기 시작했는데, 이는 실제로는 복부 대동맥류였다. 말년까지 일본 국내외 여러 지역을 답사하며 집필한 기행문 시리즈 《가도를 가다》(街道をゆく|가이도오 유쿠일본어)는 1971년부터 1996년까지 잡지 주간 아사히에 총 1,146회 연재되었다.[5][3] 이 시리즈는 NHK에서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어 방영되기도 했다.1990년대 중반, 《가도를 가다 - 타이완 기행》 취재차 방문한 타이완 타이베이에서 당시 총통이었던 리덩후이와 회담하기도 했으며, 이 경험을 바탕으로 《장소의 비애》(場所の悲哀|바쇼노 히아이일본어)를 집필했다. 말년에는 노몬한 사건(할힌골 전투)을 작품화하려는 구상을 했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1996년 1월, 《가도를 가다 - 신비참주기》(濃尾参州記|노비산슈키일본어) 취재를 마쳤다. 연재 중이던 같은 해 2월 10일 심야에 토혈(내부 출혈)하며 쓰러져 혼수상태에 빠졌고,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이틀 뒤인 2월 12일 복부 대동맥류 파열로 사망했다.[3] 향년 72세였다. 그의 작품 《유채꽃의 바다》(菜の花の沖|나노하나노 오키일본어)와 연관 지어 기일인 2월 12일은 '유채꽃 기일'(菜の花忌|나노하나키일본어)이라 불린다. 사후 종3위에 추서되었다(1996).
사후 시바 료타로 기념 재단이 발족되었고, 시바 료타로 상이 제정되었다. 2001년에는 생전 자택이 있던 히가시오사카시에 시바 료타로 기념관이 세워졌다.
3. 작품 특징
역사소설가로서 월터 스콧 이래의 인물 중심주의적 흐름을 계승했으며, 필명에서 나타나듯 사마천의 『사기』 열전 형식을 본받았다.
기본적으로 등장인물, 특히 주인공에게 호의적인 시각을 보이며, 작가가 호감을 느끼는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이를 통해 작가가 주인공에게 느끼는 공감을 독자에게까지 확장시켜 독자를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이는 방식을 자주 사용한다. 또한 역사의 거시적인 흐름을 서술하면서도 풍문이나 뒷이야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등장인물을 묘사한다. 다소 거리를 둔 객관적인 묘사를 통해 건조한 유머와 여유 있는 인간 긍정의 태도를 보여주는 방식은 이전 일본 역사소설의 전통과는 다른 면모이며,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여담이지만…"이라는 표현으로 대표되듯, 이야기의 본 흐름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에피소드나 작가 자신의 경험담(등장인물의 후손과의 교류, 방문했던 장소에 대한 묘사 등)을 삽입하는 수필과 같은 기법도 특징적이며, 많은 독자들이 이러한 부분에 매력을 느낀다.
평론가 가와모토 사부로는 시바 료타로를 후지사와 슈헤이, 이케나미 쇼타로와 함께 '일평이타로(一平二太郎)'로 묶어 "성숙한 일본 남성"이 즐겨 읽는 작가로 평가했다.
그의 독특한 문체는 와타나베 나오키나 시미즈 요시노리 등의 파스티슈(모방) 대상이 되기도 했으며[30], 사케미 켄이치의 『후궁소설』처럼 그에게 경의를 표하는 작품이 등장하기도 했다.
작품 속 인물의 내면 묘사에 깊이 파고들지 않는다는 점에서 "피상적이다"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며, 장편 소설의 경우 주제가 일관성을 잃고 흐트러진다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다수의 등장인물을 빠른 호흡으로 그려내며 이야기를 전개하는 시바 료타로의 스타일을 고려할 때 이는 어느 정도 불가피한 측면이라는 반론도 존재한다. 특히 내면 묘사를 피하는 것은 인물을 외부에서 관찰하고 유형화하여 보여주는 18세기 유럽 소설이나 중국 고전 사서의 영향이 크며, 이는 '전형으로서의 인간'을 그릴 것인가, '전형에서 벗어나려는 내면'을 묘사할 것인가 하는 소설 기법의 차이(18세기형 소설과 19세기형 소설의 차이)로 이해될 수도 있다. 장편 소설의 구성력이 약하다는 지적과 관련하여, 마루야 사이치는 "전체의 5분의 3 지점부터 산만해진다", "초반의 복선이 후반에 제대로 활용되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이러한 "산만함"이나 "종잡을 수 없음"이 오히려 잘 다듬어져, 다양한 인물들이 연이어 등장하고 여러 여담을 남기며 사라져 가는 그랜드 호텔 형식의 소설로서 성공을 거두었다고 평가받는 작품도 있다(예: 『사람들의 발소리(ひとびとの跫音)』).
작가로서 후반기에는 소설 창작보다는 수필이나 문명 비평에 주력했으며, 합리적 사고를 바탕으로 구체적인 고증을 통한 역사 평론을 전개했다. 그러나 그의 자료 활용 방식에 대해서는 비판도 제기된다. 예를 들어, 전쟁 기록물 『레이테 해전기』의 저자 오오카 쇼헤이는 시바 료타로의 저서 『순사』에 대한 비평에서 그의 역사소설에 대해 "때때로 서술의 근거를 제시해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흥미로운 자료만 골라 옮겨 다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품게 된다"고 지적했다.
4. 역사관
시바 료타로는 주로 에도 시대 막부 말기와 메이지 시대 초기에 일본이 겪은 극적인 변화의 시기를 작품의 주요 배경으로 삼았다. 그의 역사 소설은 역사적 사건에 대한 독창적인 분석과 묘사를 통해 일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국민 작가"로 평가받는다.[31]
대표작 중 하나인 《료마가 간다》는 메이지 유신 시기 활약한 사카모토 료마를 주인공으로 하여, 쇄국 정책에서 벗어나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며 근대 국가로 나아가려는 시대적 변화와 개혁의 움직임을 비중 있게 다룬다.[3] 이 작품은 출판 전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사카모토 료마를 대중적인 영웅으로 만들었으며, 일본 내에서 2,125만 부 이상 판매되었다.[4]
또 다른 주요 작품인 《산 위의 구름》은 메이지 유신 이후 러일 전쟁을 배경으로, 근대화를 통해 국제 사회에서 일본의 위상을 높이려는 노력을 그리고 있다. 이 작품 역시 1,475만 부 이상 판매되며 큰 인기를 끌었다.
시바 료타로의 작품들은 베스트셀러이자 롱셀러로서 많은 독자에게 읽혔으며, 다수가 드라마나 영화로 제작되어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31] 그의 역사 해석은 많은 일본인에게 영향을 주었으나, 그 관점(이른바 '시바 사관')에 대한 비판적 시각 또한 존재한다.
4. 1. 노몬한 사건과의 관계

역사 작가 시바 료타로는 1968년 소설 『산 위의 구름』 연재를 시작할 무렵부터, 자신의 전시 중 학도 징용으로 예비 장교로서 일본군 제1전차사단 제1전차연대에 배속되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노몬한 사건(할힌골 전투)을 다룬 소설을 구상하고 취재를 시작했다. 시바 료타로는 노몬한 사건이 자신의 인생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술회했다.[10]
:도대체 일본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처음 생각하게 된 것은 노몬한 사건이었습니다. 쇼와 14년(1939년), 제가 중학생 때였습니다. 이렇게 어리석은 전쟁을 하는 나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노몬한에는 실제로 간 적이 없습니다. 그 후에 들어간 전차 연대가 노몬한 사건에 참가했습니다. 도대체 이런 어리석은 짓을 하는 나라는 무엇일까 하는 것이, 일본이란 무엇인가, 일본인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한 최초의 의문이 되었습니다.[10]
시바 료타로는 또한 "우리 부대의 선조(라고 해도 불과 4, 5년 전의 선조지만)가 이 참혹한 전투에 참가하여 산산이 조각났다"[51] 등 여러 차례 자신의 소속 부대였던 제1전차연대가 노몬한 사건에 참전했다고 언급했다. 만약 자신이 5년 일찍 배속되었다면 비참하게 전사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노몬한 사건에 대한 강한 집착으로 이어졌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 노몬한 전투에 투입된 것은 시바 료타로가 소속되었던 제1전차연대가 아니라 제3전차연대와 제4전차연대였다.
시바 료타로는 방위연구소 전사실의 협력을 얻어 노몬한 사건 관련 비공개 자료를 입수하는 등 10년에 걸쳐 노몬한 사건을 취재하고 조사했다. 하지만 취재 과정에서[33] 일본군의 실상에 환멸을 느꼈다고 전해진다. 그는 노몬한 전투를 "소련의 전차 집단과 분대 훈련만 유난히 능숙한 일본의 구식 보병과의 철과 살의 전투로, 일본 전차는 한 대도 참가하지 않았고, 할하(ハルハ) 강을 사이에 둔 황야는 잔혹하게도 일본 보병의 학살장과 같은 광경을 보였다. 사건이 끝날 무렵에야 드디어 바다를 건너 수송되어 온 89식 중전차 부대가 구름과 안개처럼 많은 소련의 BT전차 부대에 전투를 걸었다"고 묘사했으며, "(일본군의 전차포는) 쏘아도 쏘아도 작은 BT전차의 강판에 스쳐 상처조차 입힐 수 없었고, 반대로 일본의 89식 중전차는 BT전차의 작고 빠른 포탄 때문에 한 방에 제압되었다. 순식간에 전장에 89식의 철의 시체가 흩어져 널브러져 있었다. 전투라기보다는 일방적인 학살이었다"고 생각했다. 또한 일본군이 종심방어 개념 없이 "(일본군은 심층진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전 병력에 가까운 것을 최전선에 배치하여, 실처럼 가는 얇은 진용으로 돌격했다. 일본군은 마치 개미지옥에 빠져드는 곤충과 같은 상태에 놓였다"고 보았다.
이러한 인식 하에 시바 료타로는 "그 결과, 일본은 노몬한에서 대패했고, 게다가 그 교훈을 살리지 못하고 2년 후에 태평양 전쟁을 시작할 정도로 어리석은 나라이며, 조사하면 할수록 허무해졌기 때문에, 노몬한에 대한 소설을 쓸 수 없게 되었다"고 작가 한도우 이치리에게 후일 이야기했으며[34], "일본인인 것이 싫어졌다"며 결국 노몬한 사건의 작품화를 단념했다.[35]
그러나 시바 료타로의 인식에는 사실과 다른 부분이 많다는 지적이 있다. 일본군 89식 중전차는 제2차 노몬한 사건 중반에는 이미 일본 본토로 귀환하고 있었고, 사건이 끝날 무렵에야 겨우 전장에 도착했다는 시바 료타로의 인식은 사실 착오이며, 1939년 7월 3일 할하 강 동안에서의 전투에서 일본군 제3전차연대와 소련군 제11전차여단이 노몬한 사건 최대의 전차전을 벌였지만, 소련 측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 동일 날 정오에 시작된 전차전에서는 89식 중전차가 소련군의 BT-5를 3량 격파한 데 대해 89식 중전차의 손실은 2량(소련군은 4량 격파를 주장)으로, 호각 이상의 싸움이었다.[82] 그 후에 제3전차연대는 소련군의 속사포와 전차가 배치된 진지를 강공하여 소련군 전차 32량과 장갑차 35량을 격파했다고 보고하고 있다(소련 측 기록은 불명[82]). 애초에 노몬한 사건에서는 일본군의 전차와 장갑차의 손실은 35량(그중 89식 중전차는 16량)이었던 데 대해, 소련군의 손실은 397량(그중 BT-5와 BT-7은 216량)으로 훨씬 크고, 89식 중전차가 소련군 전차에 일방적으로 격파되었다는 것도 시바 료타로의 사실 착오이다.
또한 노몬한 사건 전투에서 적군 진지를 강공하여 큰 피해를 입은 것은 일본군보다 오히려 소련군이며, 소련군 대공세 때 후이(フイ) 고지와 놀로(ノロ) 고지 등에 일본군이 구축한 진지를 강공하여 큰 피해를 입고 있다. 이이치 에이이치 중좌가 이끈 제23사단 수색대가 지켰던 후이 고지에 대해, 이이치는 속사포 진지에 예비 진지를 4~5개 정도 구축하여 포격할 때마다 진지 변경을 해서 적의 공격을 피하는 교묘한 구조를 하는 등, 반대로 심층진지를 만들어 강공해 온 소련군에게 큰 피해를 주고 있다. 시바 료타로의 인식과는 달리 소련군이 노몬한에서 많이 사용한 것은 심층방어가 아니라 심층공격이며, 8월의 대공세 때 위력을 발휘했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더욱 진화하여 1944년 6월에 시작된 바그라티온 작전이 그 집대성이 되었다고 되어 있다.[69]
시바 료타로는 소련군이 거의 손해를 보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처럼 암시되고 있지만, 일본군 보병이 일방적으로 학살당했다는 설은 시바 료타로가 노몬한 사건의 취재를 진행하고 있던 1960~1970년대에는 명확하지 않았던 소련군 정보가 공개됨에 따라 부정되고 있다.[36][37]
한편, 시바 료타로는 전후 나가노현 가미야마다 온천에서 온천 여관을 경영하고 있던 보병 제26연대장 스미 신이치로(須見新一郎) 전 대좌를 알게 되었다. 연대장 해임의 경위에서 군 중앙의 참모에게 불쾌감을 품고 있던 스미는 참모를 "악마"라고 욕설할 정도였으며, 쇼와 군부에 비판적이었던 시바 료타로와 의기투합하고 있다. 스미는 명확하게 일본 육군의 작전 용병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며, 시바 료타로의 소설 구상에 딱 맞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시바 료타로는 스미를 주인공의 모델로 삼아 소설을 쓰기로 결정하고, 열심히 가미야마다 온천을 드나들었다. 1974년 분게이 슌주(文藝春秋) 정월호에서 시바 료타로는 참모본부 전 참모로 이토추 상사 부사장이었던 세지마 류조와 대담을 나누었고, 그것이 기사가 되었지만, 스미는 엘리트 참모였던 세지마에 대해 "저 사기꾼"이라고 화를 내고 있으며, 그 세지마와 대담을 나눈 시바 료타로에 대해 "저런 불량배와 싱글벙글 대담을 나누고 반론하지 않고 넘어가는 작가는 믿을 수 없다"며 격분하여 이후의 취재는 일절 받을 생각이 없다는 절교장을 보냈기 때문에, 시바 료타로는 노몬한 사건 소설 쓰는 것이 어려워졌다.[35][38][39] 후에 시바 료타로는 이때를 회상하며 "만약 내가 노몬한을 쓴다면 혈관이 파열될 것 같다"고 말했다.
몽골 연구가 사사키 켄에츠(佐々木健悦)는 시바 료타로의 역사 인식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각이며, 노몬한 사건을 쓸 수 없었던 것은 시바 료타로의 지적 태만과 지적 불성실 때문이라고 비판하면서, 몽골 헌법에 대한 기재도 잘못되었다고 지적했다.[40]
역사학자 하타 이쿠히코는 시바 료타로가 노몬한 사건 소설을 쓸 수 없었던 이유로 아래 4가지를 들고 있다.
# 시바 료타로의 이미지에 맞는 주인공이나 조역을 찾을 수 없었다.
# 국경 분쟁이라는 중도적인 전쟁 형태.
# 전차대는 별다른 전과 없이 1주일 만에 전장을 떠났다.
# 고미카와 준페이 「노몬한」 등 경쟁하는 선행 작품이 등장했다.
4. 2. 비판
시바 료타로의 역사관은 '시바 사관'이라고 불리기도 하며, 그의 작품 속 묘사가 역사적 사실처럼 받아들여지는 경향에 대한 비판이 존재한다. 특히 노몬한 사건에 대한 그의 인식과 관련하여 여러 지적이 제기되었다.시바 료타로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일본군 제1전차사단 제1전차연대에 배속되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노몬한 사건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밝혔다. 그는 자신이 소속되었던 제1전차연대가 노몬한 사건에 참전하여 큰 피해를 입었다고 여러 차례 언급했으나, 실제 노몬한 전투에 투입된 것은 제1전차연대가 아닌 제3전차연대와 제4전차연대였다.
시바는 노몬한 사건을 취재하면서 소련군의 압도적인 전차 전력 앞에 일본군 보병이 일방적으로 학살당했으며, 일본군 전차는 거의 활약하지 못하고 쉽게 격파되었다고 인식했다.[33] 그는 "노몬한 전투는 소련의 전차 집단과 분대 훈련만 유난히 능숙한 일본의 구식 보병과의 철과 살의 전투로, 일본 전차는 한 대도 참가하지 않았고, 할하(ハルハ) 강을 사이에 둔 황야는 잔혹하게도 일본 보병의 학살장과 같은 광경을 보였다. 사건이 끝날 무렵에야 드디어 바다를 건너 수송되어 온 89식 중전차 부대가 구름과 안개처럼 많은 소련의 BT 전차 부대에 전투를 걸었다"거나 "(일본군의 전차포는) 쏘아도 쏘아도 작은 BT전차의 강판에 스쳐 상처조차 입힐 수 없었고, 반대로 일본의 89식 중전차는 BT전차의 작고 빠른 포탄 때문에 한 방에 제압되었다. 순식간에 전장에 89식의 철의 시체가 흩어져 널브러져 있었다. 전투라기보다는 일방적인 학살이었다"고 묘사했다. 또한 일본군이 심층방어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고 "(일본군은 심층진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전 병력에 가까운 것을 최전선에 배치하여, 실처럼 가는 얇은 진용으로 돌격했다. 일본군은 마치 개미지옥에 빠져드는 곤충과 같은 상태에 놓였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실제 사실과 차이가 있다. 노몬한 사건에서 벌어진 전차전에서 일본군 89식 중전차는 소련군 BT 전차와 호각 이상으로 싸웠으며, 1939년 7월 3일 할하 강 동안 전투에서 제3전차연대는 소련군 제11전차여단을 상대로 BT-5 3량을 격파하는 동안 89식 중전차 2량 손실(소련 측은 4량 격파 주장)을 기록했다. 이후 제3전차연대는 소련군 진지를 강습하여 전차 32량과 장갑차 35량을 격파했다고 보고했다(소련 측 기록 불명). 노몬한 사건 전체에서 일본군의 전차 및 장갑차 손실은 35량(89식 중전차 16량 포함)이었던 반면, 소련군의 손실은 397량(BT-5, BT-7 216량 포함)으로 훨씬 컸다. 89식 중전차가 일방적으로 격파되었다는 시바의 인식은 사실과 다르다.
또한 일본군 역시 후이 고지 전투 등에서 교묘한 진지 구축과 운용으로 심층공격을 시도한 소련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이이치 에이이치 중좌가 이끈 제23사단 수색대는 후이 고지 방어 시 속사포 진지에 여러 예비 진지를 구축하고 포격 시마다 진지를 변경하는 방식으로 소련군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하며 큰 피해를 주었다. 시바의 인식과 달리 소련군이 노몬한에서 주로 활용한 것은 심층방어가 아니라 심층공격 전술이었으며, 이는 1944년 바그라티온 작전에서 더욱 발전된 형태로 나타난다. 시바는 소련군의 피해가 미미했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이나, 이후 공개된 정보에 따르면 소련군 역시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는 것이 밝혀졌다[36][37].
시바 료타로는 노몬한 사건에 대한 소설 집필을 위해 오랫동안 자료를 조사했으나, 조사 과정에서 일본이라는 국가와 일본인에 대한 회의감을 느끼고 "일본인인 것이 싫어졌다"며 집필을 단념했다고 전해진다.[34][35] 또한 취재 과정에서 알게 된 전 보병 제26연대장 스미 신이치로와의 관계가 틀어진 것도 집필 포기의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쇼와 군부에 비판적이었던 스미는 시바와 의기투합하여 소설의 모델이 되기로 했으나, 시바가 이토추 상사 부사장이었던 전 참모 세지마 류조와 대담을 나누자 "저런 불량배와 싱글벙글 대담을 나누고 반론하지 않고 넘어가는 작가는 믿을 수 없다"며 격분하여 시바와의 관계를 끊었기 때문이다[35][38][39]. 시바는 이후 "만약 내가 노몬한을 쓴다면 혈관이 파열될 것 같다"고 회고했다.
몽골 연구가 사사키 켄에츠(佐々木健悦)는 시바 료타로의 역사 인식이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각이며, 노몬한 사건 집필 포기는 그의 지적 태만과 불성실 때문이라고 비판했다.[40] 역사학자 하타 이쿠히코(秦郁彦)는 시바가 노몬한 사건 소설화를 포기한 이유로 ▲작품에 적합한 인물 부재 ▲국경 분쟁이라는 애매한 전쟁 형태 ▲전차대의 미미한 활약과 조기 철수 ▲고미카와 준페이의 선행 작품 존재 등을 꼽았다.
5. 저술
필명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郎)는 한(漢) 시대의 역사가 사마천(司馬遷)에 버금가는 작가가 되겠다는 뜻에서 따온 것이다(시바는 사마의 일본식 표기).[1] 그는 오사카 외국어학교(현재 오사카대학 외국어학부[2])에서 몽골어를 전공했으며, 산케이 신문(産經新聞)에서 기자로 경력을 시작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역사 소설을 쓰기 시작하여, 1959년 소설 《부엉이 성》(梟の城)으로 나오키상(直木賞)을 수상하며 작가로 데뷔했다. 주로 에도 시대 말기(막부 말기)와 메이지 시대 초기의 격동기를 배경으로 한 역사 소설을 집필했으며, 역사적 사건에 대한 독창적인 분석으로 널리 인정받았다. 대표작으로는 《군토리 이야기》(國盜物語), 《료마가 간다》(龍馬がゆく), 《모에요 켄》(燃えよ剣), 《산 위의 구름》(坂の上の雲) 등이 있으며, 이들 작품 다수는 NHK 대하드라마 등으로 영상화되어 큰 인기를 얻었다. 1993년에는 문화훈장(文化功労者)을 받았다.[3]
소설 외에도 수많은 수필을 남겼는데, 특히 일본과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쓴 기행문 시리즈 《가이도오 오 유쿠》(街道を行く)는 주간 아사히에 1,146회 연재되며[3] 큰 호응을 얻었다. 이 시리즈는 역사, 지리, 인물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과 문화 비교적인 시각을 담고 있으며, 여러 권의 책으로 출간되었고 NHK에서 다큐멘터리로도 제작되었다.[5] 그의 여러 작품은 영어 등 외국어로도 번역되었다.
- -시바 료타로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전차대 예비 장교로 복무했던 경험이 그의 작품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술회했다. 특히 본토 결전 준비 중 대본영 장교에게 피난민 발생 시 작전 수행에 대해 질문했을 때 "치어 죽여라"라는 답변을 들었던 경험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고 한다.[41]
> 속성 교육만 받은 저에게는 어려운 것은 몰랐지만, 아마추어로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 도로가 텅 비어 있다는 전제하에 설명하고 있지만, 도쿄와 요코하마에는 많은 인구가 살고 있습니다. 적이 상륙하면 당연히 그 사람들이 움직입니다.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대팔거에 가재도구를 싣고 북관동이나 서관동의 산으로 피하기 위해 도로를 북상해 올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당시 관동의 대부분 도로는 포장이 되어 있지 않았고, 도로 폭도 좁아서 간신히 2차선 정도의 도로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전차가 남하하고, 대팔거가 북상하는 경우의 교통 정리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장교는) 한동안 저를 노려보더니, 이내, 昂然히 「치어 죽여라」라고 말했습니다. 같은 국민인데 말입니다.
— 「돌토리이에 붙은 때」
그는 이 경험을 통해 "이렇게 어리석은 전쟁을 일본인들은 왜 했을까"라는 근본적인 의문을 품게 되었고, 이 의문을 풀기 위해 역사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이 일화는 시바 료타로가 여러 저서와 인터뷰에서 언급했으나, 질문 주체나 답변자의 직책 등이 조금씩 다르게 묘사되거나[42] 당시 상황과 맞지 않는다는 반론 및 작가의 창작이었다는 주장[42][41]도 제기된다. 그럼에도 이 경험이 군국주의 일본의 비인간성과 전쟁의 본질에 대한 그의 문제의식을 형성하고 소설가로서의 길을 걷게 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음을 시사한다.
그는 자신이 복무했던 97식 중전차에 대해 "동시대 최고의 기계", "유연하고 차고가 낮다", "디젤 엔진" 등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이 전차의 최대 결점은 전쟁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적의 전차에 대한 방어력도 거의 없었다"고 비판하는 등 애증 섞인 시각을 드러냈다. 반면 89식 중전차에 대해서는 성능과 전과에 대해 사실과 다른 부정적인 평가를 하기도 했다.[46] 이러한 모습은 전차병으로서의 경험과 전쟁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해석된다. 그는 전우회 활동에 적극 참여하고 전차병 경력에 자부심을 갖는 모습도 보였으며,[47][48] 일본 전차 부대 발상지인 구루메의 '전차비' 재건 시 비문을 작성하기도 했다.[46]
> 다이쇼 14년 이곳에 일본 최초의 전차대가 탄생했다
그 후 20년 싸움이 많고 전장은 넓어지고 사람들은 이 차량과 함께 생사를 함께하고 쇼와 20년 그 역사를 닫았다
세상의 가치관을 넘어 사실은 후세에 전해져야 할 것이기 때문에 그 발상을 기념하여 이곳에 살아남은 자들이 모여 죽은 사람들의 넋을 위로하면서 전차비를 세운다
쇼와 49년 5월
구 전차병 유지 980여 명
육상자위대 기갑과 3500여 명
— 시바 료타로
5. 1. 장편 소설
아래는 시바 료타로의 장편 소설 목록이다. 제목, 출판 연도, 출판사, 주요 등장인물 또는 내용 순으로 정리하였으며, 한국어로 번역된 작품은 '한국어 번역 여부' 항목에 '예 (☆)'로 표시하였다.연도 | 제목 (원제) | 출판사 | 주요 등장인물/내용 | 한국어 번역 여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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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 올빼미의 성 (梟の城일본어) | 고단샤 | 이시카와 고에몬 | 예 (☆) |
1960년 | 가미가타 부시도 (上方武士道일본어) | 주오코론샤 | ※ 작가 사후 《피어오르는 가미가타 부시도》(花咲ける上方武士道일본어)로 제목을 바꾸어 재출간됨. | 아니오 |
1961년 | 바람의 무사 (風の武士일본어) | 고단샤 | 에도 시대 말기, 이가 도신(伊賀同心일본어)의 후손 쓰게 신고(柘植信吾일본어)를 주인공으로 한 전기소설. | 아니오 |
1961년 | 전운의 꿈 (戦雲の夢일본어) | 고단샤 | 조소카베 모리치카 | 아니오 |
1962년 | 풍신의 문 (風神の門일본어) | 신초샤 | 사나다 10용사(真田十勇士일본어) 중 기리가쿠레 사이조. | 아니오 |
1963–1966년 | 료마가 간다 (竜馬がゆく일본어) | 문예춘추 | 사카모토 료마 | 예 (☆) |
1964년 | 타올라라 검 (燃えよ剣일본어) | 문예춘추 | 히지카타 도시조, 신센구미 | 예 (☆) |
1964년 | 시리쿠라에 마고이치 (尻啖え孫市일본어) | 고단샤 |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사이가 철포 부대(雑賀鉄砲衆일본어)를 이끈 사이가 마고이치. 오다 노부나가에 맞선 이야기. | 아니오 |
1965년 | 공명의 갈림길 (功名が辻일본어) | 문예춘추 | 야마우치 가즈토요와 그의 아내 지요(千代일본어) | 아니오 |
1965년 | 성을 얻은 이야기 (城をとる話일본어) | 고분샤(光文社일본어) | 아니오 | |
1965–1966년 | 나라 훔친 이야기 (国盗り物語일본어) | 신초샤 | 사이토 도산, 오다 노부나가, 아케치 미쓰히데, 도요토미 히데요시 | 예 (☆) |
1966년 | 아아 낭화유협전 (俄 浪華遊侠伝일본어) | 고단샤 | 막부 말기 협객 아카시야 만키치(明石屋万吉일본어) 등 오사카 서민들의 시선으로 그린 막부 말기 모습. | 아니오 |
1966년 | 세키가하라 전투 (関ヶ原일본어) | 신초샤 |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시다 미쓰나리, 시마 사콘, 혼다 마사노부 | 예 (☆) |
1966년 | 북두칠성의 사나이 (北斗の人일본어) | 고단샤 | 지바 슈사쿠(千葉周作일본어) | 아니오 |
1967년 | 열한 번째 지사 (十一番目の志士일본어) | 문예춘추 | 아니오 | |
1967년 | 마지막 쇼군 (最後の将軍일본어) | 문예춘추 | 도쿠가와 요시노부 | 아니오 |
1967년 | 순사 (殉死일본어) | 문예춘추 | 노기 마레스케, 고다마 겐타로 | 아니오 |
1968년 | 여름 풀의 노래 (夏草の賦일본어) | 문예춘추 | 조소카베 모토치카 | 아니오 |
1968년 | 신사태합기 (新史太閤記일본어) | 신초샤 |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시다 미쓰나리, 도쿠가와 이에야스 | 아니오 |
1968년 | 요시쓰네 (義経일본어) | 문예춘추 | 미나모토노 요시쓰네 | 아니오 |
1968년 | 언덕 (峠일본어) | 신초샤 | 가와이 쓰구노스케(河井継之助일본어) | 아니오 |
1968년 | 미야모토 무사시 (宮本武蔵일본어) | 아사히신문사 | 《일본자객전》(日本剣客伝일본어) 수록. 미야모토 무사시 | 아니오 |
1969–1972년 | 언덕 위의 구름 (坂の上の雲일본어) | 문예춘추 | 아키야마 요시후루, 아키야마 사네유키 형제, 마사오카 시키, 고다마 겐타로, 도고 헤이하치로, 야마모토 곤노효에, 노기 마레스케, 히로세 다케오. 러일 전쟁 관련. | 예 (☆) |
1969년 | 요괴 (妖怪일본어) | 고단샤 | 히노 도미코, 아시카가 요시마사 | 아니오 |
1969년 | 대도선사 (大盗禅師일본어) | 문예춘추 | 다이주 선사(大濤禅師일본어)의 막부 전복 및 명나라 부흥 계획을 그린 판타지 소설. 주인공 우라야스 센파치(浦安仙八일본어), 유이 쇼세쓰(由比正雪일본어), 정성공(鄭成功일본어). | 아니오 |
1969년 | 세월 (歳月일본어) | 고단샤 | 에토 신페이(江藤新平일본어), 오쿠보 도시미치 | 아니오 |
1971년 | 세상 사는 나날 (世に棲む日日일본어) | 문예춘추 | 요시다 쇼인, 다카스기 신사쿠 | 아니오 |
1971–1972년 | 성채 (城塞일본어) | 신초샤 | 오사카 겨울 전투, 오사카 여름 전투를 그린 작품. 오바타 가게노리(小幡景憲일본어), 도쿠가와 이에야스. | 아니오 |
1972년 | 화신 (花神일본어) | 신초샤 | 오무라 마스지로, 기도 다카요시 | 아니오 |
1973년 | 패왕의 가문 (覇王の家일본어) | 신초샤 | 도쿠가와 이에야스 | 예 (☆) |
1975년 | 하리마의 앞바다 (播磨灘物語일본어) | 고단샤 | 구로다 조스이( 黒田如水일본어) | 아니오 |
1975–1976년 | 나는 듯이 (翔ぶが如く일본어) | 문예춘추 | 메이지 유신 ~ 세이난 전쟁. 오쿠보 도시미치, 사이고 다카모리, 가와지 도시요시(川路利良일본어). | 예 (☆) |
1975년 | 공(空)의 바다 (空海の風景일본어) | 주오코론샤 | 구카이 | 아니오 |
1979년 | 호접몽 (胡蝶の夢일본어) | 신초샤 | 시바 료카이(司馬凌海일본어), 마쓰모토 료준(松本良順일본어), 세키 간사이(関寛斎일본어) | 아니오 |
1980년 | 항우와 유방 (項羽と劉邦일본어) | 신초샤 | 중국 초한전쟁을 다룬 소설. | 예 (☆) |
1981년 | 저마다의 발소리 (ひとびとの跫音일본어) | 주오코론샤 | 마사오카 시키의 여동생 마사오카 리쓰(正岡律일본어)의 양자 마사오카 주사부로(正岡忠三郎일본어). | 아니오 |
1982년 | 유채꽃의 바다 (菜の花の沖일본어) | 문예춘추 | 다카다야 가헤이(高田屋嘉兵衛일본어) | 아니오 |
1984년 | 하코네 고개 (箱根の坂일본어) | 고단샤 | 호조 소운(北条早雲일본어) | 아니오 |
1987년 | 달단질풍록 (韃靼疾風録일본어) | 주오코론샤 | 중국 청나라 건국자 누르하치, 홍타이지 등. 명청교체기 중국을 일본 히라도번 출신 가쓰라 소스케(桂庄助일본어)의 관점에서 묘사. | 예 (☆) |
5. 2. 단편 소설
- '''白い歓喜天|하얀 환희천일본어''' (1958년, 범범사) - 첫 출간 단편집. 후에 문고본으로 재간되었다.
:* 「ペルシャの幻術師|페르시아의 환술사일본어」, 「戈壁の匈奴|과벽의 흉노일본어」, 「白い歓喜天|하얀 환희천일본어」, 「兜率天の巡礼|도솔천 순례일본어」
- '''大阪侍|오사카 고개일본어''' (1959년, 도호샤) - 몇 작품을 바꾸어 고단샤 문고본으로 재간되었다.
:* 「和州長者|와슈의 장자일본어」, 「泥棒名人|도둑질 명인일본어」, 「盗賊と間者|도적과 간자일본어」, 「法駕籠のご寮人さん|법가에 숨은 귀인일본어」, 「大坂侍|오사카 고개일본어」, 「難波村の仇討|나니와 촌의 복수일본어」
- '''最後の伊賀者|최후의 이가 닌자일본어''' (1960년, 문예춘추신사) - 고단샤 문고본으로 재판되었다.
:* 「外法仏|외법불일본어」, 「下請忍者|하청닌자일본어」, 「伊賀者|이가 닌자일본어」, 「最後の伊賀者|최후의 이가 닌자일본어」, 「蘆雪を殺す|로세쓰를 죽여라일본어」, 「天明の絵師|천명의 화가일본어」
:* 「八咫烏|야타가라스일본어」, 「朱盗|주도일본어」, 「牛黄加持|우황가지일본어」, 「果心居士の幻術|가신거사의 환술일본어」, 「飛び加藤|나는 가토일본어」, 「壬生狂言の夜|미부 교겐의 밤일본어」
- '''おお、大砲|오오, 대포여일본어''' (1961년, 주오공론샤) - 몇 작품을 바꾸어 『言い触らし団右衛門|떠드는 단고에몬일본어』(주오 문고)으로 재판되었다.
:* 「言い触らし団右衛門|떠드는 단고에몬일본어」, 「岩見重太郎の系図|이와미 주타로의 계도일본어」, 「売ろう物語|팔리는 이야기일본어」, 「雑賀の舟鉄砲|사이가의 후네텟포일본어」, 「おお大砲|오오 대포여일본어」
- '''一夜官女|일야궁녀일본어''' (1962년, 도호샤) - 「女は遊べ物語|여자는 노는 이야기일본어」, 「京の剣客|수도의 검객일본어」를 추가하여 주오 문고본으로 재판되었다.
:* 「一夜官女|일야궁녀일본어」, 「雨おんな|비의 여인일본어」, 「侍大将の胸毛|사무라이 대장의 가슴털일본어」, 「伊賀の四鬼|이가의 네 귀신일본어」
- '''真説宮本武蔵|진설 미야모토 무사시일본어''' (1962년, 문예춘추신사) - 고단샤 문고본으로 재판되었다.
:* 「真説宮本武蔵|진설 미야모토 무사시일본어」, 「京の剣客|수도의 검객일본어」, 「越後の刀|에치고의 칼일본어」, 「千葉周作|지바 슈사쿠일본어」, 「上総の剣客|가즈사의 검객일본어」, 「奇妙な剣客|기묘한 검객일본어」
- '''花房助兵衛|하나부사 조베에일본어''' (1963년, 도겐샤)
:* 「伊賀者|이가 닌자일본어」, 「奇妙な剣客|기묘한 검객일본어」, 「花房助兵衛|하나부사 소베에일본어」, 「軍師二人|두 사람의 군사일본어」, 「割って、城を|가르라, 성을일본어」, 「千葉周作|지바 슈사쿠일본어」, 「上総の剣客|가즈사의 검객일본어」
- '''幕末|막부 말기일본어''' (1963년, 문예춘추신사) - 전 12편 중 10편은 월간지 『オール讀物일본어』(1963년), 「冷泉斬り|레이제이 참살일본어」은 월간지 『日本일본어』(1962년 6월호)에 발표되었다. 「逃げの小五郎|줄행랑 고고로일본어」만이 본작에서 처음 나왔다. 문춘 문고로 재판되었다.
:* 「桜田門外の変|사쿠라다문 밖의 변일본어」, 「奇妙なり八郎|기묘한 하치로일본어」, 「花町屋の襲撃|하나마치야 습격일본어」, 「猿ヶ辻の血闘|사루가쓰지 혈투일본어」, 「冷泉斬り|레이제이 참살일본어」, 「祇園囃子|기온 축문일본어」, 「土佐の夜雨|도사의 밤비일본어」, 「逃げの小五郎|줄행랑 고고로일본어」, 「死んでも死なぬ|죽어도 죽을 수 없는일본어」, 「彰義隊胸算用|창의대 무네산요일본어」, 「浪華城焼討|낭화성 화공일본어」, 「最後の攘夷志士|마지막 양이지사일본어」
- '''신센구미 혈풍록''' (新選組血風録일본어, 1964년, 주오공론사) - 막부 말기 신센구미를 그린 연작 단편 15작품을 수록. 가도카와, 중공 문고로 재판되었다.
- '''鬼謀の人|귀모의 사나이일본어''' (1964년, 신초샤) - 표제는 오무라 마스지로, 가와이 쓰구노스케, 오카다 이조 등 막부 말기의 인물 군상을 다룬다. 후에 문고본으로 재간되었다.
:* 「鬼謀の人|귀모의 사나이일본어」, 「英雄児|영웅아일본어」, 「慶応長崎事件|게이오 나가사키 사건일본어」, 「人斬り以蔵|칼잡이 니조일본어」, 「喧嘩草雲|훤화초운일본어」
- '''酔って候|취했소이다일본어''' (1965년, 문예춘추신사) - 막부 말기의 다이묘 야마우치 요도, 시마즈 히사미쓰, 다테 무네나리, 나베시마 나오마사를 그린 전기 단편. 문춘 문고로 재판되었다.
:* 「酔って候|취했소이다일본어」, 「きつね馬|여우 말일본어」, 「伊達の黒船|다테의 흑선일본어」, 「肥前の妖怪|비젠의 요괴일본어」
- '''豊臣家の人々|도요토미 가문의 사람들일본어''' (1967년, 주오공론사) -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겼던 열 명의 인물을 그린 연작 단편. 가도카와, 중공 문고로 재판되었다.
- '''王城の護衛者|왕성을 호위하는 자일본어''' (1968년, 고단샤) - 「人斬り以蔵|칼잡이 니조일본어」를 추가하여 고단샤 문고(1971년)로 재판되었다.
:* 「加茂の水|가모 강물일본어」, 「王城の護衛者|왕성을 호위하는 자일본어」, 「英雄児|영웅아일본어」, 「鬼謀の人|귀모의 사나이일본어」
- '''喧嘩草雲|훤화초운일본어''' (1968년, 도호샤) - 표제는 막부 말기의 화가 다자키 소운의 기구한 인생을 그렸다. 후에 문고본으로 재간되었다.
- '''고향을 어이 잊으리까''' (故郷忘じがたく候일본어, 1968년, 문예춘추) - 임진왜란 당시 일본으로 끌려갔던 조선인 도공 심수관 가문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 시바 료타로의 작품 가운데 유일하게 생존 인물(14대 심수관)을 주인공으로 한다. 문춘 문고로 재판되었으며, 한국에도 번역 출간되었다.
:* 「故郷忘じがたく候|고향을 어이 잊으리까일본어」, 「斬殺|참살일본어」, 「胡桃に酒|호두에 술일본어」
- '''人斬り以蔵|칼잡이 니조일본어''' (1969년, 신초 문고) - 문고본으로 신편 재판.
:* 「鬼謀の人|귀모의 사나이일본어」, 「人斬り以蔵|칼잡이 니조일본어」, 「割って、城を|가르라, 성을일본어」, 「おお、大砲|오오, 대포여일본어」, 「言い触らし団右衛門|떠드는 단고에몬일본어」, 「大夫殿坂|다유 도노자카일본어」, 「美濃浪人|미노의 낭인일본어」, 「売ろう物語|팔리는 이야기일본어」
- '''馬上少年過ぐ|말을 탄 소년이 지나간다일본어''' (1970년, 신초샤) - 표제작은 다테 마사무네를 다룬다. 후에 「英雄児|영웅아일본어」, 「慶応長崎事件|게이오 나가사키 사건일본어」, 「喧嘩草雲|훤화초운일본어」을 추가하여 신초 문고에서 1978년 신편 재판되었다.
:* 「馬上少年過ぐ|말을 탄 소년이 지나간다일본어」, 「重庵の転々일본어」, 「城の怪|성의 요괴일본어」, 「貂の皮|담비 가죽일본어」
- '''司馬遼󠄁太郎短篇総集|시바 료타로 단편 총집일본어''' (1971년, 고단샤) - 오자키 히데키의 해설과 함께 50여 편의 단편을 수록하였다.
- '''木曜島の夜会|목요도의 밤 모임일본어''' (1977년, 문예춘추) - 시바 료타로 집필 시기 최후반기의 단편집으로, 문춘 문고로 재판되었다.
:* 「木曜島の夜会|목요도의 밤 모임일본어」, 「有隣は悪形にて|이웃은 악역일본어」, 「大楽源太郎の生死|다이라쿠 겐타로의 삶과 죽음일본어」, 「小室某覚書|고무로 아무개의 비망록일본어」
- '''おれは権現|나는 곤겐이다일본어''' (1982년, 고단샤 문고) - 문고본으로 재판된 작품들을 모았다.
:* 「愛染明王|애염명왕일본어」, 「おれは権現|나는 곤겐이다일본어」, 「助兵衛物語|소베에 이야기일본어」, 「覚兵衛物語|가쿠베에 이야기일본어」, 「信九郎物語|신쿠로 이야기일본어」, 「若江堤の霧|와카에 강둑의 안개일본어」, 「けろりの道頓일본어」
- '''軍師二人|두 사람의 군사일본어''' (1985년, 고단샤 문고)
:* 「雑賀の舟鉄砲|사이가의 후네뎃포일본어」, 「女は遊べ物語|여자는 노는 이야기일본어」, 「嬖女守り일본어」, 「雨おんな|비의 여인일본어」, 「一夜官女|일야궁녀일본어」, 「侍大将の胸毛|사무라이 대장의 가슴털일본어」, 「割って、城を|가르라, 성을일본어」, 「軍師二人|두 사람의 군사일본어」
- '''アームストロング砲|암스트롱포일본어''' (1988년, 고단샤 문고) - 막부 말기 군상극.
:* 「薩摩浄福寺党|사쓰마 조후쿠지토일본어」, 「倉敷の若旦那|창고의 젊은 주인일본어」, 「アームストロング砲|암스트롱포일본어」, 「理心流異聞|이심류 이문일본어」, 「侠客万助珍談|협객 만스케 진담일본어」, 「斬ってはみたが|베어는 보았으나일본어」, 「五条陣屋|고조의 병영일본어」, 「壬生狂言の夜|미부 교겐의 밤일본어」, 「大夫殿坂|다유 도노자카일본어」
- '''ペルシャの幻術師|페르시아의 환술사일본어''' (2001년, 문춘 문고) - 첫 문고화된 작품집.
:* 「兜率天の巡礼|도솔천 순례일본어」, 「ペルシャの幻術師|페르시아의 환술사일본어」, 「戈壁の匈奴|과벽의 흉노일본어」
- '''侍はこわい|사무라이는 무서워일본어''' (2005년, 고분샤 문고) - 저자 생전에 미수록되었던 작품들.
:* 「権平五千石일본어」, 「豪傑と小壺|호걸과 항아리일본어」, 「忍者四貫目の死일본어」, 「狐斬り|여우 베기일본어」, 「ただいま十六歳일본어」, 「侍はこわい|사무라이는 무서워일본어」, 「みょうが斎の武術|묘가사이의 무술일본어」, 「庄兵衛稲荷|소베에 이나바일본어」
- '''花妖譚|화요담일본어''' (2009년, 문춘 문고) - 신문 기자 시절 본명인 '후쿠다 데이이치' 명의로 쓴 단편 환상 소설집.
:* 「森の美少年|숲의 미소년일본어」, 「チューリップの城主|튤립의 성주일본어」, 「黒色の牡丹|검은 모란일본어」, 「烏江の月 謡曲『項羽』より|오강의 달 요곡 『항우』에서일본어」, 「匂い沼|깊은 늪일본어」, 「睡蓮|수련일본어」, 「菊の典侍|기쿠노젠시일본어」, 「白椿|흰 동백일본어」, 「サフラン|사프란일본어」, 「蒙古桜|몽골 벚꽃일본어」 등
5. 3. 수필, 기행, 대담
시바 료타로는 역사 소설 외에도 수많은 수필을 남겼으며, 이는 여러 권의 책으로 출판되었다. 그의 대표적인 기행문 시리즈로는 街道を行く|가이도오 오 유쿠일본어가 있다. 이 시리즈는 일본과 세계 여러 곳을 여행하며 기록한 다권의 일기 형식 저서이다.街道を行く|가이도오 오 유쿠일본어는 1971년부터 1996년까지 잡지 주간 아사히에 처음 연재되었으며,[5] 총 1,146회에 걸쳐 연재되었다.[3] 시바는 이 시리즈를 통해 방문한 지역의 역사, 지리, 사람들에 대한 자신의 관찰과 함께 문화 간의 관점을 제시하고자 했다. 주로 일본의 여러 지역에 관한 내용이지만, 중국, 한국, 남반 무역 시대의 스페인과 포르투갈, 아일랜드, 네덜란드, 몽골, 타이완, 뉴욕 등 여러 외국을 다룬 편들도 포함되어 있다.
현재 다권의 책으로 출판되어 있으며, NHK(일본방송협회)에서 다큐멘터리 시리즈로 제작하여 방영하기도 했다.
6. 일화
- 그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외가 주위로 고분이 많았고, 토기(土器) 파편이나 돌화살촉 등을 줍기도 했다. 또한 당시 소년 치고는 특이하다고 할 점은 아니었지만 대륙의 마적(馬賊)을 동경하기도 했다. 훗날 전차 부대의 소대장이 된 것도 그의 어린 시절 꿈의 결실이었다는 지적도 있다.
- 한국의 《월간중앙》 보도에 따르면 중학교 1학년 1학기의 영어 독해 시간에 뉴욕이라는 지명이 나오자, 시바는 교사에게 "이 지명에 무슨 의미가 있나요?"라고 물었는데, 교사는 무심하게 "지명에 무슨 의미랄 게 있더냐"라고만 반응했다. 시바는 도서관에 가서 책을 뒤지며 '뉴욕'이라는 지명의 어원과 유래가 영국 국왕의 동생 요크 공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는 걸 알아냈고, 이후 도서관을 자주 드나들게 되었다고 한다. 시바의 아내인 부인 후쿠다 미도리는 남편을 두고 "보통의 인간은 나이를 먹으면 사물에 대한 호기심이 줄어들게 마련이다. 생각할 기력이 없어진다. 시바 료타로는 반대였다. 혼이 점점 젊어진 듯했다."라고 회고하였다.[84]
- 중학교 시절 온갖 종류의 책을 독파하는 와중에 근처 아베노(阿倍野)에 있는 백화점의 도서 코너에서 소설가 요시카와 에이지의 《미야모토 무사시 전집》(宮本武蔵全集)을 서서 읽기로 모두 독파했다고 한다. 늘 찾아오면서 책을 사지도 않고 서서 읽고 가기만 하는 그에게 매장 주임이 「우리 매장이 무슨 도서관인 줄 아느냐?」라며 불평하자 「거기서 여기 있는 책을 다 사 줄 테니까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 구제 오사카 외국어학교(현재 오사카대학 외국어학부[2]) 입학 당시 교내 식당에서 상급생이 신입생을 맞이하는 환영회에서는 상급생이 게다짝에 목검이나 죽도를 휘두르면서 목청껏 고함 치고 호령하면서 훈시를 하거나 군가(軍歌)를 지도하는 관행이 있었다. 시바 료타로는 이때의 환영회에서 분위기를 띄우는 역할을 맡기도 했는데 이는 그의 성격이 얼마나 밝았는지를 보여주는 한 대목이다. 학교에는 2년 후배인 쇼노 준조(庄野潤三, 영어학과), 1년 선배인 진순신(인도어학과), 동기인 아카오 도시(赤尾兜子, 중국어학과) 등의 「창작 클럽」도 있었는데, 시바 료타로는 그에 가입하지는 않았다.
- 대학 당시의 시바 료타로는 하얗고 통통한 얼굴의 동안이었는데 구제 고등학교를 동경해 게다를 신은 채 등하교했다고 한다. 교실에서는 「읏차, 읏차」하는 소리를 내며 들어왔고 생도간에 인기 있는, 늘 사람이 모여드는 중심이었다. 수업에서도 자주 발언을 했다. 식사는 잘 했으며 아침 식사는 보통 다섯 그릇 넘게 먹어치웠다고 한다. 당시 시바 료타로의 좌우명은 「중용(中庸)의 덕(德)」이었다.
- 1943년(쇼와 18년) 11월, 학도병으로 오사카 외국어학교를 임시 졸업하고 효고현 가토군 가와이촌(현: 오노시) 아오노가하라 전차 제19연대에 입대하였다. 이듬해 44년 4월, 만주 사평의 사평육군전차학교에 입교하여 12월에 졸업하였다. 전차학교에서는 문과 출신이었기에 기계에 약하여, 어느 날 전차를 움직이려고 여기저기 만지작거리다 엔진이 시동되었는데, 안에서 백연이 나오며 “살려줘!”라는 비명이 들려 달려가 보니, 코드가 전차에 닿아 전류가 흐르고 있었다. 손도끼로 코드를 잘라 위기를 넘겼다고 한다.[18] 시마는 군대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고, 훈련 동작에도 늦는 일이 많았으며, 동기들 중에서도 전차 조종은 매우 서툴렀지만, “나는 장래에 전차 1개 소대를 받아 몽골의 마적 두목이 될 생각이다”라고 농담하는 등 웃음을 잃지 않는 밝은 성격으로 동기들의 위안이 되었다.[18] 함께 복무했던 사람이 이시하마 쓰네오였는데, 이시하마와 시마는 이때 이후로 시마가 죽을 때까지 깊은 교류를 이어갔다. 전차학교에서 성적이 좋았던 사람들은 내지 또는 외지로 전속되었지만, 성적이 나빴던 사람들은 그대로 중국에 배속되었는데, 이것이 생사를 갈랐다. 졸업 후, 만주국 무단장에 주둔하고 있던 구루메 전차 제1연대 제3중대 제5소대에 소대장으로 배속되었다. 이듬해 1945년 본토 결전을 위해 니가타현을 거쳐 도치기현 사노시로 이동하여, 여기서 육군 소위로 일본의 종전을 맞이하였다.
- 패전에 충격을 받은 시마는 “얼마나 어리석은 전쟁을 해왔는가”, “얼마나 어리석은 일들을 해 온 나라에 태어났는가”라고 며칠 동안 생각에 잠겼고, “옛날 일본 사람들은 좀 더 나았을까”라는 생각이 후에 시마의 일본사에 대한 관심의 원점이 되었으며, 취미로 시작한 소설 집필을 철저한 조사를 통해 집필하게 된 것은 “옛날이라고 하면 가마쿠라 시대이거나 무로마치 시대, 전국 시대의 일이다. 이윽고 아주 새로운 에도 시대나 메이지 시대의 일도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쇼와 시대의 군인들처럼 국가 자체를 도박에 걸고 도박장에 던져 버린 듯한 사람들은 없었다”라고 생각한 종전 당시의 시마 자신에게 “말하자면 23세의 자신에게 편지를 쓰듯이 소설을 썼다”[19]고 회고하고 있다. 복원 후에는 곧바로 도서관 출입을 재개하였다.
- 산케이 신문 입사 당시, 산케이 신문으로부터 「외국어대를 졸업했다니 영어 정도는 할 수 있겠군」이라며 입사 권유를 받았는데, 정작 시바 본인은 영어를 전혀 하지 못하면서도 「할 수 있습니다」라고 응해 산케이 신문 교토지국에 입사하게 되었다고 한다.
-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郎)는 위대한 한나라(漢) 시대 역사가 사마천(司馬遷)의 이름에서 필명을 따왔다. (시바는 사마의 일본식 표기이다).[1]
- 대표작 《료마가 간다》(龍馬がゆく)에서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의 욕설로 여러 곳에 "초린보(ちょうりんぼう, 바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58] 이 묘사가 1983년 9월 16일, 교토신문 석간 광고란의 후시미 명주회(伏見銘酒会)의 "명주 퀴즈"에 인용된 것을 계기로 문제가 되어, 시바 료타로는 부락해방동맹으로부터 규탄을 받았다.[58] 이때, 시바 료타로뿐만 아니라 교토신문과 KBS 교토 방송, 복사 하청 제작을 의뢰한 덴츠 교토 지국, 심지어 덴츠 본사까지 질타를 받았다.[58] 시바 료타로에 대한 규탄회는 1983년 12월 12일, 교토의 부락해방센터에서 열렸다.[58] 시바 료타로는 "몰랐던 자신이 부끄럽다"고 해명하며, "토사(土佐) 사투리에서는 '초린보'가 단순한 욕설이라고 생각했다. 차별받는 사람들이 '장리'라고 불렸던 것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일본어를 계속 생각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장리와 초린보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은 극히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말했다.[58] 이 사건 이후, 문제의 부분은 "바보!"로 수정되어 계속 출판되고 있다.[59]
7. 수상 및 영전
연도 | 상훈 | 수상작 / 비고 |
---|---|---|
1959 | 제42회 나오키상 | 《올빼미의 성梟の城일본어》 |
1966 | 제14회 기쿠치 간 상 | 《료마가 간다竜馬がゆく일본어》, 《나라 훔친 이야기国盗り物語일본어》 |
1967 | 오사카 예술상 | |
1967 | 마이니치 예술상 | 《순사殉死일본어》 |
1968 | 제30회 문예춘추 독자상 | 《역사를 기행하다歴史と紀行일본어》 |
1970 | 제6회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상 | 《세상에 사는 나날世に棲む日日일본어》 |
1976 | 제32회 일본예술원상 및 은사상 (문예 부문) | 《구카이의 풍경空海の風景일본어》 외 다수 |
1981 | 제33회 요미우리 문학상 (소설 부문) | 《사람들의 발소리ひとびとの跫音일본어》[10] |
1982 | 아사히상 | |
1984 | 제16회 일본문학대상 (학예 부문) | 《가도를 가다 남만의 길街道をゆく 南蛮のみち일본어》 |
1986 | 제37회 NHK 방송문화상 | |
1986 | 제38회 요미우리 문학상 (수필기행 부문) | 《러시아에 대하여ロシアについて일본어》 |
1988 | 제14회 박물관 메이지무라 상 | |
1988 | 제15회 오사라기 지로 상 | 《타타르 질풍록韃靼疾風録일본어》 |
1991 | 문화공로자 | |
1993 | 문화훈장 | [3] |
1996 | 히가시오사카시 명예시민 | 추대 |
1996 | 제1회 이하라 사이카쿠 상 | |
1996 | 종3위 및 은배 1조 | 사후 추증 |
8. 관련 작품
시바 료타로는 다작 작가로서, 주로 에도 시대 말기(막부 말기)와 메이지 시대 초기에 일본이 겪은 극적인 변화를 다루는 역사 소설과 수필을 많이 썼다. 그의 작품은 역사적 사건에 대한 독창적인 분석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 주요 작품 ===
- '''료마가 간다''' (竜馬がゆく|료마가 유쿠일본어, 1963–66): 메이지 유신에 중요한 역할을 한 사무라이 사카모토 료마의 삶을 다룬 역사 소설이다. 이 작품은 메이지 유신 이후 서구 문화의 도입으로 인한 일본의 극적인 변화를 배경으로 한다.[3] 막부 말기의 혼란스러운 시대, 쇄국 정책을 고수하던 일본이 서구 열강에 개항하면서 나라는 도쿠가와 막부 지지 세력과 존왕양이 세력으로 나뉘어 내전과 같은 상황에 놓인다. 주인공 사카모토 료마는 처음에는 존왕양이 운동에 참여하지만, 점차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 일본을 근대화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그린다. 이 소설이 출판되기 전까지 사카모토 료마는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으나[4], 이 작품을 통해 큰 인기를 얻게 되었다. 《료마가 간다》는 일본에서 2,125만 부 이상 판매된 시바 료타로의 최고 베스트셀러이다.
- '''가이도오 유쿠''' (街道をゆく|가이도오 유쿠일본어, "가도를 가다", 1971-1996): 1971년부터 1996년까지 주간 아사히에 연재된 여행 수필 시리즈이다.[5] 시바 료타로는 이 시리즈를 통해 일본 국내 여러 지역뿐만 아니라 중국, 한국, 남만 국가(스페인, 포르투갈), 아일랜드, 네덜란드, 몽골, 타이완, 뉴욕 등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그 지역의 역사, 지리, 사람들에 대한 관찰과 문화적 통찰을 기록했다. 총 1,146회에 걸쳐 연재되었으며[3], 여러 권의 책으로 출판되었고 NHK에서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어 방영되기도 했다.
- '''산 위의 구름''' (坂の上の雲|사카노 우에노 쿠모일본어, 1969):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격동의 시대를 배경으로, 시골 출신인 아키야마 형제가 일본 제국의 고위직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역사 서사시이다. 작품은 일본의 급격한 근대화와 러일 전쟁을 중심으로 전개되며, 아키야마 형제가 일본군을 강화하고 전쟁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통해 당시 일본의 부상을 그린다. 이 작품은 일본에서 1,475만 부 이상 판매되어 《료마가 간다》 다음으로 많이 팔린 시바 료타로의 작품이다.
=== 집필 포기 ===
시바 료타로는 할힌골 전투를 소재로 한 소설 집필을 위해 조사를 진행했으나, 연구를 거듭할수록 일본 제국의 어리석은 전쟁 수행 방식에 환멸을 느껴 집필 의욕을 잃었다. 그는 "일본인인 것이 싫어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어리석은 짓을 하는 일본이라는 나라를 이해할 수 없다."라고 토로하며 결국 집필을 포기했다.[6]
=== 작품 목록 ===
==== 소설 ====
- 부엉이 성 (梟の城|후쿠로노 시로일본어, 1959) - 나오키상 수상작
- 上方武士道|가미가타 부시도일본어, 1960)
- 바람의 무사 (風の武士|가제노 부시일본어, 1961)
- 戦雲の夢|센운노 유메일본어, 1961)
- 風神の門|후진노 몬일본어, 1962)
- 료마가 간다 (竜馬がゆく|료마가 유쿠일본어, 1963–66)
- 모에요 켄 (燃えよ剣|모에요 켄일본어, 1964)
- 尻啖え孫市|시리쿠라에 마고이치일본어, 1964)
- 功名が辻|고묘가 쓰지일본어, 1965)
- 城をとる話|시로오 토루 하나시일본어, 1965)
- 국도 이야기 (国盗り物語|구니토리 모노가타리일본어, 1965)
- 취한 영주 (酔って候|욧테 소로일본어, 1965), 영어 번역본 제목 Drunk as a Lord|만취한 영주영어
- 北斗の人|호쿠토노 히토일본어, 1966)
- 俄 浪華遊侠伝|니와카 나니와 유쿄덴일본어, 1966)
- 세키가하라 (関ヶ原|세키가하라일본어, 1966)
- 十一番目の志士|주이치반메노 시시일본어, 1967)
- 마지막 쇼군 (最後の将軍|사이고노 쇼군일본어, 1967), 영어 번역본 제목 The Last Shogun: The Life of Tokugawa Yoshinobu|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삶영어, 도쿠가와 요시노부에 관한 작품.
- 殉死|준시일본어, 1967)
- 夏草の賦|나쓰쿠사노 후일본어, 1968)
- 新史太閤記|신시 다이코키일본어, 1968)
- 義経|요시쓰네일본어, 1968)
- 峠|도게일본어, 1968)
- 武蔵|무사시일본어, 1968)
- 산 위의 구름 (坂の上の雲|사카노 우에노 쿠모일본어, 1969), 영어 번역본 제목 Clouds Above the Hill|산 위의 구름영어, 러일 전쟁을 배경으로 한 역사 소설.
- 妖怪|요카이일본어, 1969)
- 大盗禅師|다이토젠시일본어, 1969)
- 歳月|사이게쓰일본어, 1969)
- 世に棲む日日|요니 스무 히비일본어, 1971)
- 城塞|조사이일본어, 1971–72)
- 화신 (花神|가신일본어, 1972)
- 覇王の家|하오노 이에일본어, 1973)
- 播磨灘物語|하리마나다 모노가타리일본어, 1975)
- 翔ぶが如く|도부 가 고토쿠일본어, 1975–76)
- 空海の風景|구카이노 후케이일본어, 1975), 영어 번역본 제목 Kukai the Universal: Scenes from his Life|우주적인 구카이: 그의 삶의 장면들영어, 진언종 창시자 구카이에 관한 작품.
- 胡蝶の夢|고초노 유메일본어, 1979)
- 항우와 유방 (項羽と劉邦|고우토 류호일본어, 1980)
- ひとびとの跫音|히토비토노 아시오토일본어, 1981)
- 菜の花の沖|나노하나노 오키일본어, 1982)
- 箱根の坂|하코네노 사카일본어, 1984)
- 韃靼疾風録|닷탄 싯푸로쿠일본어, 1987), 영어 번역본 제목 The Tatar Whirlwind: A Novel of Seventeenth-Century East Asia|타타르의 회오리: 17세기 동아시아 소설영어, 명나라 멸망과 만주족의 부상, 그리고 17세기 동아시아 역사를 다룬 작품.
==== 수필 ====
- 가이도오 유쿠 (街道をゆく|가이도오 유쿠일본어, 1971-1996)
==== 만화화 작품 ====
9. 평전, 작품 평론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郎)라는 필명은 한나라(漢) 시대 역사가 사마천(司馬遷)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시바는 사마의 일본식 발음이다).[1] 그는 오사카 외국어학교(현재 오사카대학 외국어학부[2])에서 몽골어를 전공했으며, 일본의 주요 신문 중 하나인 산케이 신문(産經新聞)에서 기자로 경력을 시작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시바는 역사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잡지 週刊朝日|슈칸 아사히일본어는 시바가 일본 국내 여행에 관해 쓴 기사를 1,146회에 걸쳐 연재했다. 시바는 1959년 소설 《부엉이 성(梟の城)》으로 나오키상(直木賞)을 수상했으며, 1993년에는 정부로부터 문화훈장(文化功労者)을 받았다.[3]
시바는 다작 작가로서, 특히 막부 말기 에도 시대(江戸時代)와 메이지 시대(明治時代) 초기에 일본이 겪은 극적인 변화를 주제로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의 주요 작품으로는 《군토리 이야기(國盜物語)》, 《료마가 간다(龍馬がゆく)》, 《모에요 켄(燃えよ剣)》, 《산 위의 구름(坂の上の雲)》 등이 있으며, 이들 작품 대부분은 드라마로 제작되었고, 특히 NHK에서 대하드라마 형식으로 방영되기도 했다. 또한 여러 권의 수필집을 출판했는데, 그중 《가이도오 우 유쿠(街道を行く)》는 일본과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기록한 다권의 일기 형식 저서이다. 시바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독창적인 분석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시바의 여러 작품은 영어로도 번역되었는데, 《만취한 영주: 사무라이 이야기(Drunk as a Lord: Samurai Stories)》(2001), 구카이(空海)의 허구적 전기 《우주적인 구카이: 그의 삶의 장면들(Kukai the Universal: Scenes from His Life)》(2003),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의 전기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삶(The Last Shogun: The Life of Tokugawa Yoshinobu)》(2004), 《타타르의 회오리: 17세기 동아시아 소설(The Tatar Whirlwind: A Novel of Seventeenth-Century East Asia)》(2007), 《산 위의 구름(Clouds Above the Hill)》(2012, 2013, 2014) 등이 있다.
나오키상 심사위원 시절, SF 작가 히로세 마사시(広瀬正)의 작품이 후보로 올랐을 때 여러 번 높이 평가했지만, 다른 심사위원의 동의를 얻지 못해 수상으로 이어지지 못한 일화가 있다. 후에 요절한 히로세의 작품집 『히로세 마사시 소설 전집 2 츠이스』의 해설에서 시바 료타로는 "독자로서 가장 재밌었던 것은 히로세 마사시의 『마이너스 제로(マイナス・ゼロ)』였다. SF에는 읽는 방법이 필요하다. 처음부터 공상소설에 속는 자세로 읽어야 하지만, 그래도 이 사람의 상상력과 상상 구축의 견고함에 놀랐다"고 적었다. 이 구절은 『마이너스 제로』의 표지 광고에도 사용되었다. 초기 전기 소설을 많이 집필한 시바 료타로에게 있어 이러한 SF에 대한 호의는 이례적인 일은 아니었다.
예술가 오카모토 타로(岡本太郎)가 오사카 만국 박람회 프로듀서 취임을 제안받았을 때, 오카모토는 시바 료타로에게 프로듀서직 수락 여부를 상담했다. 시바 료타로는 "꼭 했으면 좋겠다"며 오카모토를 격려했다.[64]
옛 직장이었던 산케이 신문사를 포함한 후지산케이 그룹(フジサンケイグループ)의 시카우치가(鹿内家) 지배를 "기업의 사유화"라고 비판했으며, 하사마 시게아키(羽佐間重彰)(당시 산케이 신문사 사장)와 히에다 히사시(日枝久)(당시 후지 텔레비전 네트워크(フジテレビジョン) 사장, 산케이 신문사 이사) 등에 의한 시카우치 히로아키(鹿内宏明) 회장 해임 소식에 기뻐하며 이들에게 격려의 의미로 색지를 선물하기도 했다.[65]
전 대만 총통 리덩후이(李登輝)와는 학도출진(学徒出陣) 동기였으며, 리덩후이가 시바의 애독자였던 인연으로 친분을 쌓았다. 시바는 《대만 기행(台湾紀行)》 취재 당시 총통이었던 리덩후이와 대담을 나누기도 했다.
잡지 편집장 출신인 쓰즈키 타카시(堤堯)에 따르면, 생전의 시바 료타로로부터 "일본에는 자민당과 공산당, 이 두 개만 있으면 된다. 현실 정당과 비판 정당의 두 개만"이라는 말을 직접 들은 적이 있다고 한다. 이것은 쓰즈키가 잡지 칼럼 등에서 여러 번 언급한 이야기이지만,[67] 시바 료타로 자신은 저서에서 이러한 취지의 내용을 쓰지는 않았다.
조부인 후쿠다 소하치(福田惣八)는 효고현(兵庫県) 히메지시(姫路市) 해안 근처 교외 히로라는 마을 출신으로, 그곳에서 에도 시대(江戸時代) 동안 줄곧 농민(百姓)이었던 가계(家系)에서 태어났다. 전국 시대에는 하리마 미키성(播州三木城)에 그의 조상이 농성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신분(身分)은 알 수 없다. 정토진종(浄土真宗) 니시혼간지(西本願寺)의 열렬한 신자였고, 미키성이 함락된 후 다른 농성했던 병사들과 함께 히로무라에 정착하여 땅을 경작했다. 소하치의 아내(시바 료타로의 할머니)는 히로에 가까운 타카하마 출신으로, 시바 료타로의 아버지가 될 시죠(是定)를 낳고 얼마 안 되어 사망했다. 소하치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맞이한 것은 18세 또는 19세 무렵으로, "농민에게도 성이 생긴다더라"는 말이 나오자, 당시 마을의 소하치 일족들은 회합하여 미키(三木)라는 성을 사용하기로 합의했지만(조상이 미키성 농성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그 무렵 소하치는 친척들과 다투고 있었기 때문에 "너는 다른 성을 쓰도록 해라"라는 말을 들었다. 소하치는 뛰어난 주산(珠算) 애호가로, 결국 화산(和算)까지 공부하여 솔반(ソロバン)으로 개평법(開平法)과 개입법(開立法)을 풀기도 했다. 그 후, 가진 적은 재산으로 큰 투기를 벌였지만 무일푼이 되어 마을에 머물 수 없게 되자, 야반도주(夜逃げ)하듯 마을을 떠나 카시마(飾磨) 항구에서 배를 타고 오사카로 가서 난바에서 떡(餅) 가게를 열었다.
시바 료타로는 평생 오사카에 거주했으며, 생전 마지막 거주지는 오사카부 히가시오사카시에 위치한 시마 료타로 기념관(司馬遼太郎記念館)으로 일부 공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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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오공론사(中央公論社)
198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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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阪日日新聞 2006年 3月 14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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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필세
도쿄신문
2007-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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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현의 우리가 몰랐던 일본, 일본인(24) 사마천을 넘고자 했던 시바 료타로의 웅지(雄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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